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표트르 1세 (문단 편집) ==== 아들에게 사형선고 ==== 표트르 1세는 후계 관련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. 특히 표트르 1세는 좋은 부모가 아니었는데 황태자 알렉세이는 아버지 표트르 1세에게 큰 불만을 가졌다. 특히 그의 개혁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, 또 표트르가 귀족의 딸인 어머니 예브도키야를 소박놓고 하녀 출신인 정부(情婦) [[예카테리나 1세|마르타 헬레나 스코브론스카]][* 전시 억류자로 노예로 팔려와서 표트르의 신하의 집의 가정부로 있다가 헌납된 여자다. 나중에 표트르의 정부로 살았는데, 표트르가 황후를 폐위한 뒤에 정식으로 결혼했다.]와 놀아난 것도 한 원인이다. 러시아 국내에서는 아들(알렉세이)이 [[쿠데타]]를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 계속 흘러나왔다. 결국 알렉세이는 이 소문 때문에 표트르 1세의 추궁을 받게 되자 정부와 함께 [[합스부르크 제국|오스트리아]]로 피난했다. 이에 표트르 1세는 정부를 구슬려서 알렉세이에게 편지를 보내 돌아오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하겠다고 했으나 알렉세이가 돌아오자마자 오히려 체포한 다음 법원에 알렉세이의 처분을 맡겼다. 이때 실질적인 납치 음모를 꾸민 주인공이 톨스토이 백작[* 작가 [[톨스토이]]의 직계 조상이다.]으로, 납치 사건의 실질적 가담자인 정부는 다른 귀족과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살았다고 한다. 1718년 재판소는 알렉세이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알렉세이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감옥에서 사망했다. 표트르가 손수 고문치사를 시켰다거나 사형시켰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신빙성은 없다. 알렉세이의 유일한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[[표트르 2세]]에게도 좋은 할아버지는 아니었다. 만약 표트르 1세가 알렉세이 황태자[* [[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]]와는 다르다.]를 계속 살려뒀다면 [[표트르 2세]] 말고도 또 다른 자녀들이 있었을 것이고, 그러면 [[표트르 2세]]가 자녀를 못 얻고 죽더라도 다른 자녀들이 계승하여 [[로마노프 왕조]]의 직계 혈통이 끊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. 이후 로마노프 왕조는 스웨덴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은 독일 귀족, [[표트르 3세|카를 페터 울리히]]의 [[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]]을 통해 이어졌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